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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6]통장을 열어보니 ‘텅장’···아내의 반응은?[개척자 비긴즈]

  • 기사입력 2023.03.21 15:22
  • 최종수정 2023.03.27 15:42
  • 기자명 최기영 이영은

 


나는 ‘개척자 Y’다. 험난한 교회 개척 여정 가운데 늘 기도하며 하나님께 ‘왜(Why)’를 묻고 응답을 구하고 있다. 개척은 그 자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다. 출발선(A)에 선 개척자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Z)를 바라보며 묵묵히 걸음을 내디딜 때 당도할 수 있는 마지막 계단이 알파벳 ‘Y’이기도 하다. 그 여정의 여섯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역하면서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냈고 목회자의 ‘빨간 날’인 월요일마저 쉴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부목사 사임 후엔 180도 달라졌다. 날마다 빨간 날이었다. 종일 울려대는 카톡 알림음도, 다이어리 앱을 가득 채웠던 심방 약속도,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사역 보고와 회의도 없다. 그리고… 수입도 없다.

사임 후 2~3개월을 보내면서 떠다니는 생각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알바’였다. 하루는 가지고 있는 재정을 모두 꺼내 아내와 함께 따져봤다. 마지막 달 받은 사례비, 사임하면서 받은 감사 선물들, 퇴직금, 조금씩 저축해 둔 은행 잔고. 걱정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아끼고 아끼는 것을 이전보다 더 일상화해야 했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오르막길 앞에 선 듯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동기 목사님과 배달 라이더, 편의점 알바, 대리운전, 1t 트럭 퀵배달 등을 생각해 봤다. 아내를 설득할 말도 생각해뒀다. “목사가 성도의 삶을 모르면서 어떻게 목회 준비를 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럴싸하게 성도의 삶으로 포장했다. 아내는 단번에 말렸다. “여보, 지금까지 19년을 달려왔어요.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준비해보면 어때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예요.” 목사인 나보다 ‘목회’라는 소명을 끝까지 완수하기 위해 무엇이 우선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아내가 선배 같고 어른 같고 스승 같았다. 문득 잊고 살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전도사 Y’ 시절이다.

전도사 사례비는 하나님께도 말하기 힘들 정도다. 대부분 사역자들이 공감할 거다. 웬만한 알바보다 적은 사례비를 받으며 열정과 패기로 매주 주님의 일을 감당한다. 담임목사님들은 늘 말씀하신다. 사례에 집중하지 말고 사역에 집중하라고. 가까운 미래를 그려보니 전도사 이후 부목사의 삶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사역에 집중하지 못할 만큼의 사례는 늘 ‘걱정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일도 많았다. 하늘 상급으로 ‘퉁’치려는 교회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마음의 소리는 점점 커졌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사역을 계속해야 하나’라는 근심은 점점 쌓여 갔다.

결국 전도사 사임을 결심했다. 큰일을 냈다. 대책 없이 나왔다. 앞으로 절대 사역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카페형 베이커리를 오픈했다. 시장 조사, 예상 매출, 인구 밀집도, 손익분기점, 순이익 등을 분석하며 밝은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던가. 매출은 쉬이 오르지 않았고 하루하루가 같은 날인 게 너무 싫었다. 가혹한 세상 한복판에서 질리도록 진리를 깨닫는 나날이 이어졌다. 남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돈을 옮기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

매일이 힘들었고 매일이 고통이었다. 이런 고통과 힘듦을 탈출할 수 있는 나만의 유일한 방법이 심야 영화였다. 어둠에 묻힌 밤을 뚫고 커다란 영화관에 들어가 머릿수 몇 개 없는 공간에 앉으면 왠지 모르게 평안이 느껴졌다. 영화 시작 직전 세상의 어둠보다 더 칠흑 같은 암전이 생겼다가 첫 장면과 함께 스크린에서 빛이 쏟아져나올 땐 왠지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을 마주하는 사람이 된 듯했다.

베이커리를 개업한 지 6개월쯤 됐을까. 그날도 하루 전과 다를 것 없는 날이었고 포스기(계산대)에서 ‘슬픈 마감’을 마쳤다. 아내가 빵을 챙겨 달라고 하지 않으면 절대로 빵을 챙기지 않는데, 무슨 마음이었는지 세 봉지를 챙겼다. 빵과 몸을 차에 싣고 시동을 켰다. 부스럭거리는 빵 봉지 소리가 듣기 싫어 찬양 음악을 크게 틀었다. 잠시 후 오르막길을 지나가는데 차창 밖으로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한 분이 손수레에 폐지를 가득 싣고 언덕을 오르고 계셨다. ‘안 되겠다. 좀 도와드려야겠다.’

본능적으로 길가에 차를 대고 나서려는데. ‘빠앙~!’ 뒤따라오던 택시가 가까이 붙어 경적을 울리며 상향등을 깜빡였다. 순간 의지가 꺾일 뻔했다. ‘그냥 갈까?’ 얼른 언덕 위로 차를 몰았다. 택시를 피해 옆길에 차를 세우고 도와드리려고 내렸는데 이게 웬일. 할머니께서는 벌써 언덕 끝까지 올라오셨다. ‘언덕을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니 붙잡아 드리자’라는 생각으로 할머니께 다가서는 순간, 챙겨 나온 빵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 언덕 아래서 빵집을 하는 사람인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빵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빵을 받아들자마자 잠시 내 눈을 바라보시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순간 멍했다. 할머니께 빵을 쥐여 드린 뒤 천천히 손수레를 붙들었다.

귀가 후에도 먹먹한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할머니와의 만남과 대화가 잔상처럼 남아 계속 떠올랐다. 나는 목사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나는 전도사를 그만둔 사람이었다. 사역을 접은 사람이었고 사명을 져버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거리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를 통해 머리 한 대를 세게 맞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사명의 불을 지피게 하셨다. 빵집을 통해 무엇을 깨우쳐야 하는지 알려주셨고 할머니를 통해 당신의 음성을 전하셨다. 적잖은 기회비용을 들여서라도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으셨던 거다.

혹시 깨달음에 힘입어 빵집이 주님의 일터로 쓰임 받으며 부흥하는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나님께선 여지없으셨다. 나의 인간적이고 나약한 마음까지 꿰뚫어 보셨다. 확실하게 선을 그어 사인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깊게 새겨졌다. 개업한 지 9개월여 만에 빵집을 내놨다. 매장 양도가 될 때쯤 사역했던 교회로 찾아가 다시 사역해보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당황해하시는 담임목사님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교회는 감사하게도 다시 사역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하나님께선 신대원 그리고 부목사 안수까지 빵 세 봉지로 나를 원래의 궤도로 이끌어 주셨다. (Y will be back!)

 

 

 

 

 

 

 

 

 


최기영 기자 일러스트=이영은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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