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오늘 본문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세상입니다.본문에서 니고데모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을 겁니다. ‘세상’에는 유대인들을 괴롭히던 로마 제국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선택받은 백성인 아브라함의 자손들만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으로, 먹이를 재빠르게 사냥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다”며 독수리를 강인함의 상징으로 말씀하십니다.그러나 독수리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보면 과연 강인함을 상징하는 생물로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독수리는 사냥을 즐겨 하는 동물이기보다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거나, 죽어가는 동물을 공격해 잡아먹습니다. 그리고 독수리와 함께 까마귀와 까치도 사체를 먹는데, 까치가 독수리를 쫓아내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게 최종 목적은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후 많은 시간 하나님의 자녀로 이 땅에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신앙생활이란 구원 받기 위함이 아니고 구원받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이를 실천하는 영역입니다. 구원 사건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것입니다. 구원 사건 후 비로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이 내용은 구약 출애굽기에 자세히 설명돼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뒤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바로 입성한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1960년 10월 타임스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는 건물을 짓지만, 그 건물들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는 말을 남겼습니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나라는 폐허가 됐지만, 그는 희망과 책임감을 끝까지 잃지 않았습니다. 처칠은 암울한 상황에서도 다음세대를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현재 한국교회에선 ‘다음세대의 위기’라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반복됩니다. 이젠 위기란 표현조차 위기로 느껴지지 않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과 종의 차이가 뭔지 아느냐.’ 당연히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근데 예수님의 말씀 초점은 어디에 있나요. 평생 어디서 사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들은 집 안에 사는데, 종은 집 안에 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근데 종이 더 종이 아닐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하십니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종이 아니라는 것이고, 종이 아니라는 건 곧 아들이 된다는 거죠. 아들이 됨으로써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36절에 나옵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자유로우리라. 우리에겐 쉬운 말씀이고 간단한 말씀이지만, 그들에겐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서, 그들처럼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왜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누구도 책임져 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롬 12:2).오늘 본문은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자세히 주의해서 행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 걸음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나의 걸음을 점검하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도깨비방망이나 누르기만 하면 원하는 것이 나오는 자동판매기가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펼쳐진 일은 나 자신을 포기하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속은 것 같아 억울하기도 하고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겪은 일이 고난이란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다윗과 히브리서 11장에 나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 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마가복음 안에서만 인자라는 표현을 14회나 됩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31절에 한해 표현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자’가 표현된 성경 구절을 살펴보면 ‘초인간적 존재’임을 밝히실 때도 사용되었습니다.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루어질 자신의 진정한 사명
마음의 상태가 신체 건강에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 지금은 상식적 사실이지만 이것이 의·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의과학이 발달되기 수천 년 전에 쓰인 성경은 이미 마음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언 17:22)혈액을 만들어 내는 뼈가 마른다는 것은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며 그 원인이 심령의 근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필자는 1992년 한국 교계 최초로 ‘성서적 내적치유 세미나’를 시
목회자가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때로는 성도들의 아픔과 이해가 안 되는 고통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해외 여행지에서 삶을 마감하면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다시 구속되는 삶이 되지 않기 위해 결혼이란 굴레는 쉽게 포기했는데 가족의 굴레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없네요. 자살하면 진짜 지옥에 떨어지나요. 그런 두려움보다 현실이 더 지옥처럼 느껴져요.”한 성도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고 목사로서 어떻게 답해야 할지 깊이 고민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이런 인생의 굴레, 과연 벗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는 여로보암 2세 때로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되던 때까지입니다. 그 당시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등이 통치했고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 등이 예언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격동기 국면에 처한 이스라엘과 동시대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언했던 예언자였습니다.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아픔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도덕적 상태는 부패와 탐욕으로 가득해 죄의 구덩이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모르며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면 모든 신앙생활이 헝클어집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일평생 이어지는 과업입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징계는 훈련을 의미합니다. 훈련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훈련은 좋은 것이요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10절). 그렇다면 우리가 훈련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요.첫째 훈련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게 합니다(8절). 훈련은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 때문
보고 싶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함께 살고 싶습니다. 이는 오직 사랑하는 한 사람에게만 하는 프러포즈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프러포즈를 하십니다. 보고 싶다. 듣고 싶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자 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프러포즈입니다.아기의 방긋 웃는 얼굴은 부모의 인생 무게를 한 방에 날려버립니다. 웃는 얼굴을 보기 위해 어른들은 아이 앞에서 갖은 재롱을 부립니다. 사랑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은 인간의 양면성, 이중인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킬 박사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의사로 살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인격 분리 약을 개발하여 아주 품격 있는 의사인 지킬 박사로, 때로는 사악한 하이드로 변하면서 이중적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그는 하이드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 죄책감으로 하이드가 되는 약을 없앱니다. 그렇지만 이미 하이드로 변해 있었고 결국 하
증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 조작하거나 위증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증인의 말 한 마디에 죄가 가중될 수도 있고 누명을 벗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이라는 자리는 막중한 책임감이 주어지는 자리입니다.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은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곧 제자들이 받은 복은 복음 증인이 받은 복입니다. 복음 증거의 세 가지 복을 생각해봅니다.먼저 ‘평강의 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사랑하는 여러분,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작은 능력으로 험악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보통 고역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선 이런 우리를 두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수고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친다’라는 뜻과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한다’는 뜻입니다. 우린 거기에다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너무나 고맙고 반
현재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는 매우 큰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우리 삶의 형태가 달라졌고, 선교적 형태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근로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몰려옵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서든 그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됐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가요.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할 때입니다.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당시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가정에 복음을 전한 일을 배경으로
오늘 본문은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을 때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여인을 비난하고 질책하지만 예수님께선 오히려 이 여인이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십니다.(6절)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헌신, 즉 십자가(구원의 은혜) 앞에서의 헌신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 십자가 앞에서의 헌신은 진정한 믿음의 출발선입니다. 모든 믿음의 출발선이 되는 십자가 앞에서의 헌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네가 있는 곳은 어디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요한 하면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가 살았던 광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요단강에서 베푼 세례입니다. 인류 역사에 요한과 같은 인물은 없었습니다.요한은 제사장 집안인 사가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종교 권력의 최정점, 기득권 중의 기득권을 가진 금수저였습니다. 요한이 살던 때는 로마제국의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통치한 지 15년이 되는 해였는데 그는 폭군으로서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는 정치적인 종교 권력자였던 안나스
인류 역사에서 많은 사람에게 빛이 되고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헬렌 켈러는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꿈이 없는 사람이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불쌍해 보이지만 인생의 꿈과 비전이 없는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누구나 꿈을 꾸지만 아무나 그 꿈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꿈을 이루는 올바른 방법을 배우고 실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많은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마침내 복음 전파의 꿈을 이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은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세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첫째는 자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