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갤러리에 사뭇 이국적인 그림들이 걸렸다. 검은 피부에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입은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모습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여인들, 대도시 바하르다르에 있는 청나일폭포의 웅장함, 1년에 한 번 열리는 ‘팀카트(Timkat) 축제’의 거대 행렬 등 다양한 작품 속에서도 눈에 띄는 그림은 나무 그늘 밑에서 사람들을 진료하는 의사와 그를 둘러싼 현지인들이다.
16일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 홍건(76) 장로는 이 그림에 대해 “내가 에티오피아 시골 마을에서 환자를 보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홍 장로의 본업은 화가가 아닌 영상의학과 의사. 5년간 에티오피아에서 의료선교를 하며 틈틈이 그린 유화 작품을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미국 시카고에 체류하는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 62점을 고이 말아 들고 고국을 찾았다.
1970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서 34년간 환자들을 돌봤다. 현역 시절에도 짬을 내 20여개국에서 의료봉사를 했으며 은퇴 후인 2013년부터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명성기독병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에티오피아가 6·25전쟁에 참전해 우리를 도와줬잖아요. 그 덕에 우리나라는 이렇게 발전했는데 에티오피아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은혜에 보답하고 싶어 에티오피아를 사역지로 정했습니다.”
에티오피아 현지인들은 깨끗한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다양한 병을 갖고 있지만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는 탓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홍 장로는 병원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을 방문해 환자들을 진료하고 의약품을 전했다. 또 에티오피아 의대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유능한 의료진으로 성장하게 돕고, 현지 교회를 찾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도 했다.
몰려드는 환자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순간은 그림을 그릴 때였다. 학창 시절 홍 장로의 꿈은 화가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의대에 들어가서도 미술 동아리 활동을 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의료선교를 가서 펜으로 현지 풍경을 가볍게 그리다 보니 그림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어요. 에티오피아로 떠날 때는 아예 물감을 챙겨갔습니다. 그림은 제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하고 현지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매개체가 됐죠.”
영상의학을 전공한 그는 영상을 보며 간단한 시술을 하는 인터벤션(Intervention) 기술을 현지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한 50대 말기 암 환자는 남편이 현지인 의사였음에도 항상 그를 찾아왔다. 홍 장로는 “나는 하나님이 쓰시는 막대기에 불과하니 하나님께서 성공적으로 바늘을 움직이셔서 환자가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시술을 했다”며 “결국 그분은 돌아가셨지만 장례식에서 남편과 자녀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가 에티오피아를 떠난 지 4년여가 됐지만 그곳을 향한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19로 현지 상황이 더 나빠졌다는 소식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코로나 진단 키트도 없고, 응급 상황에 필요한 산소호흡기도 없어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고 하더군요. 여건이 좋아지면 에티오피아에 꼭 다시 가고 싶어요.”
미국에서도 의료봉사를 멈추지 않고 있는 그는 전시회 수익금을 한국기독의사회에 기부해 후학들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그의 전시 ‘아프지 마 에티오피아’는 서울아산병원 갤러리에 이어 서울 밀알미술관, 대전 천성감리교회,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서 차례로 열린다.
글·사진=박용미 기자 m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