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햇빛 속에서 지금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의 얼굴엔 경악과 희열, 황홀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리스도였다. 늙은 사도 베드로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베드로의 귀에는 맑지만 아주 슬픈 주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나의 어린 양들을 저버렸으니 내가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꼼짝 않고 땅에 엎드려 있던 사도는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다시 로마로 향했다.”(‘쿠오바디스’ 중)폴란드의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생각과/ 죽음 너머를 보는 믿음에서/ 사색의 마음을 가져오는 세월 속에서.”(‘초원의 빛’ 중)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 자연주의 시인, 호반의 시인….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사진)를 수식하는 말이다. 영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 정도는 암송할 정도로 지금까지 많은 사
시편은 성경의 노래책이며 기도 책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들은 ‘다윗의 기도’로 불립니다. 다윗의 기도는 시가 됐습니다. 시와 기도는 서로 뗄 수 없는 동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실재가 직접적이고 인격적임을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고, 시는 언어를 가장 직접적이고 인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한 편을 묵상할 때 우리의 영혼은 성령에 감동된 다윗의 기도에 스며듭니다.다윗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사실만큼이나 우리가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의미를 줍니다. 다윗은 은유로 기도했고 경험을
우리의 인생은 때론 행복하고 때론 불행하다. 우리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평범하고 사소했던 그 하루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다. 인생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건전지처럼,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촛불처럼 유한하다. 이런 우리의 인생이 눈부시려면, 바다에 떨어진 황혼처럼 눈부시게 떠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세월은 재빠르게 지나간다. 어느새 아이에서 청소년이 되고, 순식간에 성인에서 노인이 된다. 그러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어디까지 나이를 먹는 것, 나이 듦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후 유년기에
18세기 말 영국 요크셔의 외딴 마을,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서 있는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이라 불리는 저택이 서 있다. 저택의 주인 언쇼는 어느 날 리퍼블에서 한 명의 고아를 데리고 돌아온다. 그는 아이에게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자기 아들인 힌들리, 딸 캐서린과 함께 키운다. 그러나 양부 언쇼가 죽자 히스클리프는 힌들리에게 심한 모욕과 학대를 받고, 사랑하는 캐서린에게 배신을 당하고 가출한다. 히스클리프는 3년 후 부자가 돼 돌아오지만, 캐서린은 이미 지주인 에드가 린튼과 결혼한 후
우리는 살아가면서 신앙도 정직함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형통한 것을 볼 때 의아해집니다. 더욱이 불법을 저지른 악인이 탄탄대로를 걷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왜 저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의문이 듭니다.‘시편 37편’은 많은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란 주제의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과 의를 행하는 삶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결실이 없어 보이지만, 결국 의인의 결말은 하나님의 인정과 구원을 통해 영원한 삶을 보장받는다고 노래합니다.악인의 성공에 분노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이 들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슬픈 노래 부르지 마세요/내 머리맡에 장미도/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세요/위에 녹색 잔디를 덮어/소나기와 이슬방울에 젖게 두세요/하여 생각나면 기억하시고/잊으려거든 잊으세요/그림자도 못 보고/비도 못 느낄 거예요/나이팅게일이 고통스레/울어대도, 안 들릴 거예요/뜨지도 지지도 않는/황혼 속에서 꿈꾸다가/어쩌면 기억할지도/어쩌면 잊을지도 몰라요.”(‘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영문학사에 기록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 가운데 하나인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를 쓴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사진
다윗은 고난을 이겨내면서 성장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성장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시편 25편은 다윗이 온갖 역경을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수년 동안 도망자 신세로 쫓기며 살아온 다윗이 이젠 왕으로 명령하는 위치에 있습니다.시편 25편엔 다윗이 겪었던 수많은 투쟁, 그의 범죄와 진실한 회개, 그리고 그가 겪었던 깊은 고뇌 등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노년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국 침례교 목사이자 명설교자 찰스 스펄전(1834~1892)은 ‘시편 강해’에서 “이 시는
“그 집 자녀교육 성공했던데”라는 말을 들어보면 대개 자녀를 명문대에 진학시켰다는 부모 이야기다. 자녀를 잘 키웠다는 평가가 ‘부모 노릇’의 내용이 아니라 자녀를 어디에 입학시켰느냐로 점수가 매겨지는 현실이 아쉽다.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사회에 ‘황금 티켓 신드롬’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우리 사회의 오래된 현상을 짚어 낸 것 같다. ‘OECD 한국 경제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은 명문대 진학, 대기업·공기업 취업 등 낮은 확률의 황금 티켓을 손에 쥐기 위해 개인들이 모든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며 이를
“주님, 제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제힘으로는 더 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습니다. 제가 처해 있는 시간은 이제 삶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무거운 살과 피를 지니고 그런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25시’ 중)루마니아의 작가이자 성직자였던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1916~1992·사진)는 생애 동안 한국을 세 번이나 방문해 한국인들에게 다소 친숙한 이름이다. 그가 한국에 남다른 관심을 두었
시편 24편은 위엄과 승리의 노래입니다. 시의 역사적 배경은 다윗이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를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왔을 때입니다.(삼하 6:1~3; 대상 13:5~8) 기럇여아림에 방치됐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지는 일은 먼 길을 떠났다가 다시 입궁하는 ‘왕의 귀환’ 같았기에 다윗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 마치 왕을 영접하는 듯했습니다.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은 기쁨으로 베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윗은 언약궤가 올라가는 것을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는 것으
“새장에 갇힌 새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리로 노래를 하네/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열망하는 것들에 대해/ 그 노랫가락은 먼 언덕 위에서도 들을 수 있다네/ 새장에 갇힌 새는 자유를 노래하니까….”(마야 안젤루의 시 ‘새장에 갇힌 새는 두려움에 떨리는 소리로 노래를 하네’ 중) 미국의 작가 마야 안젤루(1928~2014·사진)는 토니 모리슨, 오프라 윈프리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여성으로 꼽힌다. 그의 삶의 밀도는 촘촘하고, 모양은 굴곡지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에 그는 한계에 도전해 소설가, 시인, 가수, 배우, 영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릴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 앞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포기하라고, 도망가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숱한 삶의 고난을 이겨낸 다윗은 ‘시편 11편’에서 “여호와께 피하였다”라고 노래합니다.시편 11편은 다윗이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신뢰를 노래한 ‘신뢰 시’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사울 왕이 다윗을 향해 적대감을 품고 핍박하기 시작할 때 이 시를 썼을 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이
인간은 가치 있는 일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두려움’이란 용기를 내게 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맞설 각오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기는 두려움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워하는 것을 담대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용기의 반대말은 ‘두려움’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두려움의 종류는 많지만, 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이며 이때 필요한 것이 용기다.상담가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려면 ‘자기 긍정’이 아닌 ‘자기 수용’이 먼저라고 말한다. 자
‘스토 부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아래 사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다. ‘활자가 된 노예의 슬픔’이 담긴 이 한 권의 책이 당시 미국 문명의 물줄기를 바꾸는 마중물이 될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세기 미국은 성직자들이 앞장서 기독교의 만민평등의식에 어긋나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하면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노예제도의 수용은 미국 사회가 기독교 정신을 저버리고 이기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를 택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미국이 이상적인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길 염원했
시편 30편은 다윗이 큰 위험에서 건짐을 받거나 심각한 질병에서 회복된 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아름다운 감사 시입니다. 이 시를 쓸 때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백성들에게 내려진 재앙을 원수들이 조롱할까 두려워했습니다. 당시 다윗이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불순한 의도로 다윗이 지시한 ‘인구조사’(삼하 24장, 대상 21장)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내리신 역병으로 볼 수 있습니다.감사 시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들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고 질병을 고치
18세기 영국소설의 ‘개척자’인 동시에 ‘완성자’라는 평가를 받는 제인 오스틴(1775~1817·아래 사진)은 장편소설 ‘오만과 편견’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이다. 일생 6권의 소설을 남긴 오스틴은 ‘예민한 관찰자’였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관계와 사회계급제도뿐 아니라 여성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했다. 케임브리지대학의 FR 리비스 교수가 ‘위대한 전통’이란 소설론에서 영국 소설을 짊어질 영예를 다섯 작가에게 부여했는데, 그는 영국소설의 ‘위대한 전통’이 제인 오스틴에서 시작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 조지프 콘래드를 거쳐
시편 103편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시이지만 그중에서도 부모, 특히 아버지와 관련이 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아버지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길 원하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3절) 이는 우리가 좋은 아버지를 볼 때 그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들이 자신의 초상이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우리(부모)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는 것을 보며 부성을 배웁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부성을 배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
18세기 중엽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새뮤얼 존슨(1709~ 1784·아래 사진)은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그리스도교적 색채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17세기 블레즈 파스칼과 19세기 쇠렌 키르케고르의 영적 계보를 잇는다는 평을 받는다. 그는 신앙적으로는 성례전과 교회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교회파(High Church) 성공회 신자였다. 그의 글쓰기는 자기 성찰에서 시작한다. 거기에 성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합해 모두에게 적용 가능한 도덕률과 원리를 전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의 인생관이 담긴 소설 ‘라셀라스’이다. 국내 독자들
시편 32편은 ‘다윗의 마스길’이란 표제가 붙어있습니다. 마스길(maskil)은 ‘깨닫다’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주로 교훈적이거나 명상적인 시편의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편 32, 42, 44, 45, 52~55, 74, 78, 88, 89, 142편 등 모두 13개의 시편이 여기에 해당합니다.다윗이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한 이 시편은 죄의 고백과 용서가 담긴 참회의 시이기도 합니다.많은 학자는 시편 32편이 시편 51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둘 다 회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