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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빛을 찾아 마음 속을 걷다

코로나 이후 다시 열린 은성수도원 1박2일 동행기

  • 기사입력 2023.01.14 03:00
  • 기자명 우성규
수십년간 돌을 옮겨 만든 돌담길과 십자가.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은혜 은(恩)이 아니다. 숨을 은(隱)이다. 숨어있는 거룩함을 발견하는 곳, 개신교 은성(隱聖)수도원이다. 장로회신학대 경건훈련원인 경기도 포천의 은성수도원이 코로나 기간의 긴 침묵을 깨고 다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장신대 신학대학원생 전원이 20명씩 조를 나눠 재학 중 반드시 2박 3일 일정으로 거쳐야만 하는 영성훈련의 장소, 포천 운악산 깊은 계곡에 있는 수도원이 올해 3월부터 다시 신학생들과 성도들을 만나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다.

경기도 포천 은성(隱聖)수도원의 현판.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의 ‘영성나무’ 회원들과 지난달 26~27일 수도원에 머물렀다. 수도원 공식 재개원을 앞두고 1박 2일 일정으로 영성세미나가 이어지는 자리였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자 돌로 된 십자가가 먼저 눈에 띄었다. 무수한 돌을 쌓고 또 다져서 만든 돌담과 비탈길을 거쳐 좁은 문에 이르니 ‘隱聖’ 두 글자가 매달려 있다.

은성수도원 예배실 현관문 손잡이 위의 문구.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침묵(沈默)’ 글자도 여기저기 새겨져 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거룩함 속에서 들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니 우선 침묵이 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배실 출입문에 붙어 있는 “이곳은 자기를 죽이는 곳입니다” 안내문이 가슴을 때렸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삶’은 한국교회 최고의 신앙고백이다.

돌에 새겨진 침묵(沈默).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영성나무는 영성목회와 영성신학을 공부하는 목회자와 신학자, 신학생들의 모임이다. 이경용 청주 영광교회 목사가 회장을 맡고 있다. 이 목사의 인도로 30여명 회원이 모인 가운데 첫날 오후 경건회가 시작됐다. 이 목사는 “숨을 은(隱)이고 은혜 은(恩)이 아니지만, 수십년간 장신 출신 다수의 목회자와 신학자가 거쳐 간 이곳 수도원 공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홀로 기도하는 골방.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경건회 이후 김정희 한일장신대 객원교수의 ‘기독교 걷기 전통’ 강의가 시작됐다. 미국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영성훈련, 걷는 기도, 긍휼사역 등을 전공해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교수는 “저도 신대원 때 은성수도원에 경건훈련으로 들어와 유해룡 오방식 교수님께 배웠고, 골방에서 울면서 기도했던 기억이 새롭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 교수는 내면에 이는 감정의 폭풍우 때문에 영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내면의 세계를 돌아보면서 나를 이해하고 돌보는 치유, 그리고 이웃을 돌보는 긍휼의 훈련을 하면서 스스로 편안해지고 남을 위한 행동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걷기 묵상’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주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나무 현판.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김 교수는 기독교의 걷는 기도가 내면의 움직임을 가라앉히고 영감과 지혜를 불러온다고 설명했다. 몸으로 드리는 기도인 만큼 기도와 삶의 통합을 돕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된다고 전했다. 기독교 걷기 전통으로는 네 가지를 소개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시작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끝나는 성 야고보의 길,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14처를 걷는 길, 미로 형태 굽은 길을 걷는 ‘래버린스’, 목적지 없는 여행을 뜻하는 ‘페레그리나치오’ 등을 언급했다. 낯선 곳에 나를 던져 걸음으로써 연약한 자아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 온전하게 집중하는 훈련이었다.

저녁에는 유해룡 모새골공동체교회 목사의 목회 이야기가 이어졌다. 유 목사는 장신대 영성신학 교수를 역임하며 한국교회에 이를 본격 소개한 1세대 개신교 영성신학자다. 교수 은퇴 이후 경기도 양평 모새골교회에 청빙돼 영성신학을 영성목회에 접목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유 목사는 “목회감이 안 된다”고 자기를 낮췄다.

영성나무 회원들이 지난달 26일 수도원 예배실에서 영성 세미나를 열고 있다.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유 목사는 “주님은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말씀하셨지만 나는 헌 부대였다”면서 “헌 부대이니 새 포도주를 받기 위해 찢어지고 꿰매면서 다시 넓어져야 하는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신학을 목회에 접목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으며, 목회자는 교인들을 공부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그냥 같이 사는 사람임을 일깨우는 가르침이었다. 목회자가 찢어지고 다시 자기 마음을 기우면서 성도들을 받아들이길 반복할 때 교인들이 모인다고 전했다. 젊은 목회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헌 가죽 부대와 새 포도주 비유는 미국의 침례교 신학자 하비 콕스의 용어다. 교회 안 성도들의 고유한 행동이 의도를 가진 건 아닐지라도 공동체 곳곳을 할퀼 수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며 찢기고 싸매면서 성숙해 가는 것이 결국 목회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란 뜻이다. 이를 깊이 깨달은 유 목사는 “학교가 고요한 호수라면, 교회는 출렁이는 물, 세상은 파도치는 바다”라고 했다. 영성신학을 전공한 교수들의 눈도 반짝였다.

이튿날 새벽 눈 덮인 수도원 경내를 홀로 걸었다. 여차하면 운악산 정상 쪽으로 바위를 타며 숨 가쁘게 오를 수 있지만, 의도적으로 등산을 포기하고 수도원 안에서만 심호흡과 함께 조용히 걸었다. 엄마 젖을 떼고 한 살 때부터 해온 걷기이지만, 이게 기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험은 낯선 것이었다.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신경세포의 연결을 끊는 기분으로 숨 고르기를 하며 묵상에 집중했다. 산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감미롭게 다가오면서, 왜 20세기 대표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 목사가 새를 관찰하는 탐조 여행에 그렇게 매진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어제는 무심코 지나친 자작나무 숲이 보였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과 존재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 21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의 가르침도 떠올랐다.

일상 속의 걷기를 통해 매 순간 깨어있는 훈련을 하는 일. 이건 비단 수도원에서만이 아니고 삶의 태도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존재 자체로 사랑과 긍휼이 행동으로 옮겨져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도록 하는 일이 절실해졌다.

영성나무 일행은 둘째 날 수도원 경내의 엄두섭 목사 묘소에 들러 추모 기도를 드렸다. 엄 목사는 장신대 1기 출신으로 1979년 돼지 축사가 있던 이 자리에 지금의 은성수도원을 시작했다. 돌 하나하나를 손수 나르며 20년간 말 그대로 한국 개신교 수도원 영성의 문을 연 엄 목사는 1990년대에 주선애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에게 이를 넘기고 물러난다. 주 교수는 장신대 경건훈련원으로 다시 기증해 신학생들이 조용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수도원으로 가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면을 강조하는 수도자 안내문. 포천=신석현 포토그래퍼

유 목사는 일행에게 여성용 털모자를 보여줬다. 마른 몸에 머리숱이 조금 부족한 유 목사에게 남긴 주 교수의 유품이었다. 혹한의 강추위에 허름한 수도원 건물, 개보수를 일부러 거부하고 필요 최소한의 환경 속에서 고양이 세수만 하며 조용히 내면에 집중해 본 1박 2일의 경험은 소중했다. 이날 영성나무 모임을 시작으로 3월부터 젊은 신학도들이, 그리고 한국교회 성도들이 숨어있는 이곳 골짜기를 거룩한 침묵의 기도로 채울 것이다.

포천=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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