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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세 넘어 배운 한글, 하나님께 배웠지요”

95세 화가 김두엽 할머니의 삶과 신앙

  • 기사입력 2022.10.03 16:58
  • 기자명 양민경
화가 김두엽 할머니가 지난 30일 전남 광양의 자택에서 작품을 들어보이며 웃고 있다. 광양=신석현 포토그래퍼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찬송가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올해 95세인 화가 김두엽 할머니가 작업 중 즐겨 부르는 곡이다. 지난 30일 전남 광양의 자택을 찾았을 때도 김씨는 이 찬송가를 또렷한 목소리로 불렀다. 막내아들인 화가 이현영(54)씨의 격려로 83세에 그림을 시작한 그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일주일에 5일 정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각종 꽃과 김매는 논, 고추밭과 집 등 일상과 추억을 소재 삼아 그린 김씨의 그림은 색감과 구도가 조화롭고 그림체가 사랑스럽다는 평을 받는다. 방송인 최화정, 소통전문가 김창옥 서울여대 겸임교수 등 여러 유명인이 김씨의 작품을 소장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흥얼거리는 콧노래에는 찬송가가 적잖다. “글을 모를 때 찬송가를 그저 외웠기 때문에 (자연히) 나와요. 떠듬떠듬 찬송 외우다 글을 배웠응께, 나는 하나님이 글을 가르쳐 준 셈이지요.” 거실 한편에 마련된 작업대에서 김씨가 보여준 손때 묻은 찬송가에는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등 그가 좋아하는 곡이 수록된 장마다 모서리가 깊숙이 접혀 있었다.

화가 김두엽 할머니가 2019년 그린 작품 '하얀 민들레'. 갤러리엠 제공


고생으로 얼룩진 인생
김씨의 인생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난다. 192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18세에 해방을 맞았다. 당시 단추공장에서 일하던 김씨는 해방 소식을 듣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단추공장 밖으로 나와 수도에서 손을 씻는데 공장의 한국 직원들이 만세 부르는 소리가 들려. 그때가 12시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해방된 걸 알았지.”

공장 인근 오사카 군인병원에 일본군이 아닌 미군이 들어차자 다른 재일한국인처럼 그도 일본을 떠날 준비를 했다. 1946년 8월쯤 김씨는 가족과 ‘야미배’(밀항선)에 올랐다. ‘일본인이 앙심을 품고 떠나는 조센징 옷 싹 다 벗기고 때려죽인다더라’란 소문이 두려워 연락선을 타지 못했다. 그마저도 일본인에 들킬까 싶어 보름을 배에서 숨어지내다 가까스로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 도착해서도 그는 쉴 틈이 없었다. 생계를 위해 무작정 보따리를 이고 부둣가에서 떡을 팔았다. 열심히 일해 고국에서 잘살아 보리라는 희망은 가산이 모두 도난당하면서 사라졌다. “아버지가 일본 돈을 우리 돈으로 바꾸려고 은행에 가는 도중 도둑을 맞아버렸어요. 결국 돈도 없고 갈 데 없어 광양 외갓집으로 갔지요. 집도 없고 참 고생 많이 했어.”

가족의 짐을 덜어주고자 48년 21세에 중매결혼을 한 이후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결혼하던 그해 광양에서 여순 사건을 겪었고 얼마 뒤 6·25 전쟁이 일어났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베스트셀러 ‘파친코’의 첫 문장처럼 김씨는 역사의 파고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일해 가족을 지켰다. 50대까지는 농사를 지었고, 60~80대엔 여수와 서울의 세탁소와 목욕탕에서 일하며 8남매를 키웠다.

화가 김두엽 할머니가 2019년 그린 작품 '바닷가 마을'. 갤러리엠 제공



하나님은 한글 선생님
배움의 때를 놓쳐 일본과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김씨는 한글을 읽고 쓰는 일이 항상 어려웠다. 억척스레 일만 하던 그가 한글을 익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60세 넘어 교회 문턱을 넘고부터다. 서울 거주 당시 이웃의 전도로 교회에 간 김씨는 예배 중 한글 공부를 결심했다. “목사님 설교를 가만히 들으니 ‘스스로 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에게 의지하게 된다’는 말씀을 해요. 나는 항상 옆 사람에게 ‘알려주세요’ ‘펴 주세요’ 해서 성경책도 펴고 찬송가도 폈는데. 이젠 나 스스로 해야겠다 싶었지요.”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 주보와 찬송가를 매일 보는 것이었다. 찬송과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외운 뒤, 찬송가와 주보를 보며 글자를 하나하나 대조하는 식으로 한글을 뗐다. 그가 “하나님께 글을 배웠다”고 웃으며 말하는 이유다. “한글을 배운 다음엔 어딜 가든 물어보지 않고 스스로 다녔어요. 버스를 타도 항상 가게 간판을 봐요. 한글이 보일 때 참 행복하더라고요.” 현재 그는 이씨 내외와 순천수정교회를 출석 중이다.

2019년 KBS 인간극장 ‘어머니의 그림’으로 이름을 알린 김씨와 아들 이씨는 광양과 순천을 넘어 전국에서 전시회를 열고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오는 11월엔 전북 전주 지후아트갤러리에서 ‘김두엽, 이현영 모자(母子)전’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 출간한 수필집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와 시인 나태주와 같이 펴낸 시화집 ‘지금처럼 그렇게’(북로그컴퍼니)의 호응에 힘입어 현재는 캘리그라피 작가와의 협업도 진행 중이다.

김두엽 할머니가 지난 30일 전남 광양의 자택에서 막내아들인 화가 이현영씨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모습. 광양=신석현 포토그래퍼


전국의 팬에게 전할 말이 있는지 묻자 김씨는 “내가 뭔 말을 하겠느냐. 우리 아들은 글도 그림도 배웠지만 나는 그것도 아닌데 그저 봐 주니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기도 제목을 묻자 김씨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저 ‘하나님, 저 당신 손은 놓지 않고 꼭 잡고 있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도와주세요. 고통 없이 천국 가고 우리 아들 잘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지요.”

다소 숙연했던 분위기는 이씨가 그림 이야기를 하자 깨졌다. “근데 엄니, 이 그림에서 여기는 텅 비어 있어.” 그러자 김씨는 붓을 들어 그림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뒤 활짝 웃었다. 이를 보며 이씨는 말했다. “저는 어머님이 그림을 그리면 안심이 돼요. TV 보거나 누워있으면 마음이 안 좋고요. 어머님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그림 그리면 좋겠습니다.” 광양=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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